요즘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삼국지를 읽지 않아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삼국지속에서 나오는 조조, 유비, 관우, 등등 과 같은 인물들을 보면 저절로 마음이 설레는 느낌도 있을 것이고, 또 삼국지 안에서의 여러 얘기들을 보면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도 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기도 하다. 오늘은 삼국지연의속에서 그리고 삼국지의 정사 속에서 말하는 초한의 멸망에 대해서 한번 들춰볼까 한다.

 

초한 중국의 삼국시대 중 1개의 국가로 존속기간은 A.D208~A.D263년이다. 물론 기간은 위,초,오 삼국 중에서 존속기간은 가장 짧다. 이러한 이유는 여러 가지 방면으로 분석 할 수 있다. 촉의 국력 방면에서 가장 큰 이유를 들 수 가있는데, 초는 삼국 중에서 국력이 가장 약한 국가였다. 당시의 초는 유비의 동오 원정 이후 형주를 몽땅 잃고 당시의 상황은 위가 13개 주에 91개 군을, 오가 5개 주에 45개 군을, 초는 겨우 2개 주에 22개 군을 소유하고 있었다. 인력과 재력을 합쳐보면, 위가 천하의 65%를 오가 대략 25%를 차지한 반면, 초는 겨우 전체의 10%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전의 초한은 달랐었다. 제갈량의 건국대계에 따라 형주, 익주를 차지한 상태에서 천하에 변고가 생기면 형주와 익주 2길을 통해 중원의 완성과 낙양 그리고 장안을 직접공략 하는 목표였지만, 결국엔 유비 이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망쳐놓은 것 이였다. 비록, 유비가 아무리 창업의 군주라고 할지언정, 10년 넘게 노력해서 쌓아 올린 기반을 눈 깜짝할 사이에 초한의 절반이나 날려버렸다. 일단, 이점에서부터 우리는 의심해봐야 할 것 같다. 유비는 과연 아무 책임도 없었던 것인지……

 

흔히, 중국사람들은 ‘구제불능 아두’라는 말이 있다. 한마디로 그는 구제불능 백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생각한다. 과연 그가 그렇게 백치이고, 무능한 황제였었는지 말이다. 아두는 황제 즉위 당시, 초는 피폐해 질대로 피폐해져 언제 망할지 모르는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 이였다. 한마디로, 아두는 유비가 다 망쳐놓은 찌그러진 가게를 물려 받은 샘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초한은 망한다는 것을…. 그러나 아두는 유비와 달랐다. 제갈량이라는 감독의 말을 듣지 않는 주연유비와는 달리 아두라는 새로운 주연은 열심히 제갈량을 따라 주었고, 또 그는 자기의 주제를 잘 알고 있는 드문 황제이기도 하였다. 만약 아두 역시 유비처럼 제갈량의 말을 듣지 않고 권력을 쥐고 흔들었다면, 초는 앞으로의 40년도 가지 못했을 것이다. 아두는 또한 다른 황제들과는 달리 심경은 훨씬 차분하였다, 남을 경계 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조정 내부도 평안 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것이 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 인가? 그는 자기 자신을 아는 현명함 또 그는 적당한 도를 갖추고 있는 명군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에 비해 유비는 어떠했는가? 유비는 서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아들이다. 당시 유비는 이미 평민으로 전락해 있는 상태였고, 또 다른 군웅들에 비해 밑천도 없고, 또 빈곤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여, 의기는 있지만, 일의 처리 능력도 상당히 떨어졌다. 유비는 물론 ‘유황숙’이라는 명패가 있기는 했지만, 이 또한 그 힘은 그리 크지는 않았다고 본다. 유비는 오히려 아두의 차분함과는 달리 일을 꼭 만드는 그 의기 때문에 관우가 죽기 이전부터도 일은 끓임 없었다. 물론 가장 큰 치명타는 관우가 죽은 후 동오 정벌 이라는 도박을 감행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우리는 한번 다시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초한이 망한 것에 대해 아두 1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 할 것인지 말이다. 우리는 절대로 권력이나 부를 쫓는 눈으로만 역사를 보아서는 절대 안 된다. 성공과 실패로만 영웅을 평가하는 것이 그런 눈이며, ‘개국 군주는 영웅이요 망국 군주는 개’라는 논리도 마찬가지다. 아두는 누가 뭐래도 망국군주이다. 하지만 촉한의 멸망의 책임을 아두에게 씌울 수 있겠는가!

 

필자는 앞으로 우리 모두가 역사를 볼 때에는 공정한 눈으로 보면 했으면 바람이다.


-인용한 서적- <황제들의 중국사> 지은이:사식(史式)